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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네큘라와 간판
월간디자인06_01호 

 


이제부터 시작할 우리의 간판 문화에 대한 언급은 누구나 한마디씩 거들 수 있는 일상의 대화이이어서 그 끝이 허망할 수도 있으므로 그러지 않으려면 서두에 조심스레 나의 얼마 되지 않는 지식과 일상의 체험들을 잘 조합할 필요가 있겠다. 최근에 나는 간판으로 어떤 이미지들을 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물론 간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훨씬 이전부터이지만 그 본격적인 시작은  얼마 전 신문에서 본 한 프랑스화가의 작품소개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한국의 알록달록한 간판들로 작품을 하게 되었는지 소상히 알기는 어려웠지만 아마도 자기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이 그의 심미안을 자극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프랑스 화가가 괘씸하게 생각이 들었던 것은 피카소가 아프리카의 원시 목공예품에서 영감을 받았던 것을 기억해내면서부터였다. 분명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의 머리 속엔 그의 눈에 분명 우리의 간판문화가 원시미개한 이색풍물 정도로 비추었을 것이라는 기분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한낱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작품이라면 그것을 통해서라도 그에게 반격을 가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무조건 우리의 간판들을 찍기 시작했고 그 대상을 어디서 찾아야 될지 골몰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디자인 페스티벌에 국내작가로 참여한 작품인 ‘리움(Leeum)'이었다. 먼저 양해를 구해야할 것은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대표적인 건축가들인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램 쿨하스를 동원해서 공들여 지은 ’리움‘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사실상 디자인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유명 건축가들도 마찬가지로 대규모 건축프로젝트에서 흔히 참여의 기회조차 배제되는 우리 현실에서 ’리움‘은 피상적으로나마 서구의 문화적 우월성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내게 선택되었던 것 뿐이다. 그런 이유에 더해서 그러한 고매한 건물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상상하기, 즉 그 프랑스 화가가 감탄했던 이 땅의 그렇고 그런 건물에서 발견되는 알록달록 기괴한 간판들을 떼어내어 모조리 부쳐버리는 것으로서 작품을 완성하였다. 부제를 부친 것이 ’간판으로 뒤덮은 버네큘라(Vernacular) 풍경‘.

버네큘라가 무엇이던가. 간단히 말하자면 풍토적이고 관습적인 지역성의 문화이다. 버네큘라 디자인은 한 개인의 독창적 예술의 산물이 아니고 집단과 지역의 산물인 동시에 생태학적 결과이므로 그것을 만든 이나 그 디자인 과정이 거의 알려지지 않으므로 익명성을 띄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한 특정 지역에 국한해서 자연스레 발생한 고유한 형태의 문화 유형인 것이다. 내가 이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은 우연찮게도 영국 유학시절 한 젊은 영국인 교사에게서 영어교습을 받게 된 것에서 비롯된다. 그가 교재로 내놓은 것은 다름아닌 ‘유로센트리즘(Eurocentrism)'에 관한 책이었다. 사전에도 안 나올 법한 ’유럽‘과 ’중심주의‘의 합성어, 즉 ’유럽중심주의‘에 관한 내용을 그가 왜 선택했는지는 끝내 감을 잡 못했지만, 한동안 나는 프리메이슨 일당이 아닌가 싶은 이 젊은이와 돼지도 않는 영어로 유럽 문화에 대해 토론하면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시간 내내 이어지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설교는 엘리트주의와 사해동포주의로 무장한, 결론에 가서는 무시무시한 유럽의 세계지배에 대한 내용이었다. 언젠가는 방법이나 강도만 틀렸지 일제가 우리를 황국신민화시킬 때 이런 교육을 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아무튼 내가 어줍잖게 고유한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얘기할 때 그가 번번이 들이대던 말이 ’버네큘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적어도 그 단어는 좋은 의미는 다 사라져버린 ’언제나 무시되어도 좋을 변두리문화‘이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버네큘러 경향이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일군의 미술계에서 시작되어 젊은 디자이너들에게서 애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형형색색의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제사에 쓰이는 돼지머리나 키치적인 소재들, 혹은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간판의 저급한 이미지들까지. 그것이 미술, 혹은 디자인적 가치가 엄연히 있음을 감히 부정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위에서 말한 치 떨리는 경험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흠칫 멀리하고 싶은 심정을 숨길 수없다. 엄밀히 말해서 이 버네큘라 역시 서구중심주의가 만들어낸 개념이라면, 비관스러운 일이겠으나 우리는 서구화된 이 세상에서 그들에 대해 느끼는 문화적 후진성, 즉 그들이 먼저 간 길 뒤따라가기를 또다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본격적인 간판 문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로 최근의 예를 한 가지 더 들어야 할 것 같다. 보름도 채 안 되었을까. 나는 자매대학과의 교류 차원에서 헝가리에서 날아온 젊은 교수에게 통역 및 가이드 겸해서 서울 구경을 시켜주어야 했었다. 디자인 이론과 비평에 꽤 정통하고 앞으로 문화사가의 꿈을 갖고 있다는 이 만만찮은 젊은이와 나는 몇 마디 나누지 않아서 건축이나 최근 유럽에서 회자되는 '어버니즘(도시설계 urbanism)'에 관해서 공통의 관심사를 찾게 되었다. 한창 얘기를 나누던 사이에 인사동으로 향하는 지름길로 간다는 것이 을지로 건축, 철물자재 상가를 거쳐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낙원상가를 지나고 있었다. 원래의 예정대로라면 매끄럽고 우아한 관광코스로 지나야할 것임에 낭패스러워 하는 나를 뒤로 하고 이 친구는 갑작스레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이러저런 무질서한 간판들과 근60년대를 생각게 하는 단층건물들, 그리고 그 앞을 버티고 서 있는 초고층 건물들을 번갈아, 혹은 하나의 화면으로 잡아낸 것들을 리플레이하면서 신기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가 이유를 물어본 즉, 이론 책에서나 읽었던 급격한 발전을 겪고 있는 국가들에서 특징적으로 볼 수 있는 도시발전의 여러 단층, 즉 레이어들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선진화된, 그러니까 고색창연한 역사를 갖고 있는 서구 도시들은 한두 가지 정도의 패턴을 보이는데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는 무수한 패턴들이 상존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예전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케빈 린치(Kevin Lynch)가 했던 표현, “도시가 시민들에게 잘 읽혀지려면 반드시 하나, 혹은 두 가지 정도의 인식 가능한 패턴과 텍스추어로 정리되어져야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실감나게도 우리는 혼재된 시대와 뒤섞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구나, 그간 간단없이 나의 머리 속을 맴돌던 화두였던 우리의 간판문화 역시 그 속에서 널브러져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길을 가르쳐줄 때 어느 건물 근처인가, 번지수가 어디쯤인가가 아니고 어디가면 무슨 간판이 눈에 띄는데 거기서 어디 간판이 보이는 곳으로 가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도시가 읽혀지는 것이 지형이나 건물 중심이 아니고 간판의 연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간판이 정말 많아진 탓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 간판은 결코 많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당연히 없었다. 일제 시대엔 말할 것도 없고 태극기 휘날리던 6.25 이후의 사진들을 보더라도 간판은 극히 드물었다. 국토재건의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빨리 빨리’가 의식 속에서 자리 잡게 되면서 그만큼 간판의 수도 늘어나고 그 급한 마음 만큼 내 것만은 눈에 확 띄도록 커지고 강조되었을 것이다. 동네어귀마다 즐비한 플래카드는 그보다 더 급한 사람들이 성질을 이기지 못해 걸어두었을 일회용 대형간판이었을 것이다. 하루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식당에선 여기저기 중언부언의 메뉴판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략 이것이 정확히 무어라 단정하기 어려운 버네큘라식 우리나라 간판의 역사인 셈이다.

근래 들어 단연 주목해야 할 것은 신도시의 간판 풍경이다. 간판이 그 지역성을 반영한다면 중산층의 신도시 보다는 엥겔지수가 높은 보다 외곽지역의 신도시가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간판들은 크면 클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아파트 단지 초입의 상가는 특히 더해서 애초의 건물의 형태를 가늠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간판들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이다. 언제부터 내가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수하게 바뀌어서 그 폐기되는 양이 엄청날 이므로간판의 주재료인 플라스틱류의 파나플랙스를 재활용할 수 있다면 분리수거보다 더 환경친화적일 것이요, 범벅이 된 간판으로 건물의 자태를 변변이 드러내지 못하는 저 고급외장재들을 실용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연말 불우이웃돕기가 필요 없을 것이다.

이 버네큘라한 간판의 치명적 오류에 대해서 아무런 규제사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3층까지는 흔히 많이 보는 가로형 파나플랙스 간판이 가능하고 그 이상은 조각글자형식의 간판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규칙은 대부분 무시되기 십상이며 불법임을 인식 못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여기에 차마 웃을 수도 없는 규제사항 한가지는 빨간 색이 간판 전체의 반을 넘을 수 없다는 것. 이를 준수하기 위해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대기업의 예를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일단 시각적 선정성 만이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 지난 월드컵에서 전국을 휩쓸었던 붉은 악마의 빨간색이 시각적으로 선정성일고 할 수 있을까. 이보다는 필시 6,70년대 멸공시대의 반공의식이 반영되어 있을 개연성이 보다 높은데 이것이 더 근접한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시대착오적인 버네큘라적 발상은 어디에고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개선의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부분적으로나마 통일화된 간판의 예를 보여준 청계천 주변 평화시장과 시에서 적극적으로 간판문화 개선을 주도한 바 있는 안양시를 들 수 있다. 청계천의 경우는 아마도 청계천변을 친환경적으로 꾸민다는 아이디어에 발맞추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나 과연 동일한 업종이라도 마치 전화번호부를 보는 듯 획일적인 인상은 너무도 어색하거니와 몰개성적이고 임시방편적이다. 또한 근래 들어 안양공공프로젝트로 주목받고 있는 안양시는 시에서 자체적으로 상업지역에 대한 간판문화 개선에 앞장섰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현재 사업주들과의 입장차이에 따른 여러 지지부진한 상황에 직면한 나머지 설계안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두 경우에 있어 공통적인 점은 간판들 간의 개성이 무시되었고 간판의 크기를 좌우하는 글자를 축소하려고만 한 것에 결정적인 우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자의 크기에 관한 한 선형구조인 영문알파벳과 단순비교 할 때 한글은 그 고유의 상하조합형식으로 인해 비선형적이므로 식별구조상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글이 훈민정음 창제 이래 이렇게 크게 씌어진 유래가 없었던 시대에 살고 있는 상황에서 간판의 한글구조에 대한 보다 다각도의 심층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했던 지나온 시간에 있어서 간판 속의 한글은 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모르는 무기명의 버네큘라 디자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간판에 관한 한 디자인 교육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아이덴티티 디자인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대기업의 사인물에 있어서는 조형적 성과가 인정되지만 그것은 전체 간판의 숫자에 비한다면 한강의 모래알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버네큘라식 간판들에 디자인의 위력이 가해질 수는 없는 것인가? 지금도 어디선가 키치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정체불명의 이조시대 풍속도로 전 건물을 뒤덮는 버네큘라가 자라나고 있는 마당에 여전히 디자인 교육 현장의 커리큘럼 어디에서고 간판 제작에 대한 디자인 개념을 가르치지는 곳은 없다. 왠지 디자인이라고 하기엔 천박하고 무시하고넘어가고 싶은 부분인 것이다. 그렇다면 책표지 디자인을 가르치듯이 간판디자인을 가르칠 수는 없을까?

요즈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곳에 인색하다. 이처럼 다분히 상업적일 수 밖에 없는 디자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기점이 공공이 요구하는, 공공이 교육바들 수 있는 분야이다. 간판에 대해서 공공을 위한 디자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간판에 관한 한 한번도 시도되지 않은 도시의 얼굴로서 간판의 지형읽기와 그에 따른 그래픽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악성의 버네큘러와 대항하는 공공을 위한 디자인의 참모습일 것이다. 도시의 시각 지형도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공공디자인의 교육을 투여하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해야만 하는 규제나 제한을 가하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다양성의 사회에서 간판문화가 어지럽다고 해서 상명하달식의 제한은 그 효과가 한시적일 것이며, 그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메카시적 발상에 불과할 것이다. 거리의 간판문화에 드러나는 진정한, 긍정적인 측면의 버네큘라란 교육의 자율적인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공공을 위한, 그래서 공공에 의한 내성이 길러질 때 아무도 모르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by beup | 2005/12/21 10:20 | j o t t e r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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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김진영 at 2006/01/25 23:42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고 교수님 생각이 들어 미소지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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